매일 쓰는 개인 일기장.
<프로덕트 매니저 원칙> | IT/모바일 | 304p
<베를린 납세자> | 에세이 | 2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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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베를린 납세자> 미리보기 페이지입니다!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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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베를린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베를린 납세자>는 그 5년간의 경험을 모은 책입니다. 표지에는 한껏 포장해서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만, 사실 일반 회사와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그저 책이 좀 더 팔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책에는 처절한 고군분투기나 대박 성공 스토리는 없습니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인생이라 대부분의 이야기는 소소합니다. 해외 취업 비법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저 '독일에서 일했던 사람의 일기' 정도의 기대감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를린은 저에게 있어 제2의 고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특별한 도시입니다. 마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났다가 깊게 친해진 친구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 덕순이의 삶을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변화시켜준 베를린의 특별함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맨오브피스
*참고*
1. 책의 내용은 모두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2. 2014년에서 2019년까지의 이야기이므로, 현재의 독일 사정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3.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베를린 하케셔막트(Hackescher Markt)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마리엔키르헤(Marienkirche)라는 교회가 나온다. 두 지점 사이에 사무실 건물이 하나 있다. 내가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근무했던 사무실이다. 그곳에서 일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나의 책상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구석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매출 리포트를 체크하다가, 이메일을 쓰다가, 스카이프로 이야기하다가, 캘린더 알림이 오면 미팅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휴게실에서 탁구를 치는 것 외에는 계속 일에 몰입했다. 회사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빠르게 성과를 내야했던 때였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기계처럼 끊임없이 두들겼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자 사무실 부엌 쪽에서 맥주병 따는 소리가 났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목마름이 느껴졌다. 부엌 냉장고로 가 맥주를 한 병 꺼냈다.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의 맥주였던 것 같다. 맥주를 챙긴 자들은 어슬렁거리며 소파나 기둥에 대충 기댔다.
"애플 펜슬 써 본 사람?"
"너 월세방은 구했어?"
동료들과 이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대충 마시다 퇴근할 사람은 퇴근하고, 더 마시고 싶은 이들은 계속 마셨다. 아내 덕순이에게 전화해 술을 마시다 가겠다고 알리고 몇 병 더 꺼내 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공짜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찬장에 과자가 있을 것 같아서 다 같이 캐비닛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과자는 없고 시리얼 상자만 가득했다. 이거라도 먹자며 시리얼을 꺼내고 있는데, 싱크대 위 선반에 놓인 위스키 병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마침 맥주가 지겨워진 참이었다. 우리는 찬장에서 빈 그릇과 에스프레소 잔을 꺼냈다. 빈 그릇에는 시리얼, 에스프레소 잔에는 위스키를 채웠다. 엄지와 검지로 잔 손잡이를 잡고, 떠들썩하게 건배를 한 후 쭉 들이켰다. 얼음 없이 미지근하게 마셔서 그런지 속에서 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렇게 취해가던 도중 일이 터졌다.
동료 하나가 유독 심하게 취해 있었다. 술뿐만 아니라 대마초까지 피워서 과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베를린은 대마초 흡연에 꽤 관대한 도시다. 주말에 거리를 걷다보면 대마초 냄새를 맡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는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뭔가를 발견했다. 깡통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우와, 안개 폭탄이 있어!!"
깡통을 자세히 보던 그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안개 폭탄은 야외 콘서트장 등에서 사용하는 파티용품으로, 터트리면 연막탄처럼 연기가 터져 나온다. 다만 그냥 연기와는 달리 색깔이 선명해서, 여러 명이 동시에 터트리면 꽤 멋지다. 문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사무실이라는 사실이었다.
"당장 그거 내려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는 그 깡통을 흔들어 터트렸다. 슈우욱 하고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그는 깡통을 탁구대 위로 던졌다. 탁구대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깡통에서 오렌지 색 연기가 자욱이 뿜어져 나왔다. 사무실 안이 순식간에 오렌지색 연기로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몇 분 후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술이 확 깼다.
우리는 일단 밖으로 도망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창문에서 예쁜 오렌지색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연기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옆 건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옆은 호스텔 건물이었다. 화재경보 소리와 오렌지색 연기에 놀란 호스텔 직원들이 투숙객들을 전부 로비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5분 후 소방차와 경찰차가 도착했다(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자동으로 소방서에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경찰관, 소방관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올라갔다. 빈 맥주병이 굴러다녔고, 독한 냄새를 풍기는 에스프레소 잔과 제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낸 안개 폭탄이 있었다. 그들은 적당히 둘러보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도 따라 내려갔다. 길가로 나가니 호스텔 직원 한 명이 모두를 초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관님, 저 멍청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거면 따뜻한 저희 로비에서 하시지요."
로비에 들어가니 수많은 투숙객들이 앉아있었다. 모두 짜증난 얼굴이었고, 죄인처럼 입장하는 우리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제일 앞에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경찰관은 우리의 신분증을 확인한 후 각자의 주소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런 뒤 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경찰관은 우리의 알코올농도를 측정한 뒤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집에 가셔도 좋습니다. 대신 나중에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발 파티는 조용히 합시다."
소방차도 떠났다. 우리는 호스텔 사람들에게 사과한 뒤 건물을 나 왔다.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다들 허세를 부렸다. 나도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웃었다. 속으론 남에게 피해주는 외국인 젊은이1이 된 것 같아 찝찝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인사한 뒤 집으로 향했다. 혹시 이번 일로 취업 비자가 취소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기물 파손도 없었고, 화재가 난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를 안심 시키다가도, 독일 사회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놈이라며 쫓아내면 어떻게 할지 걱정됐다. 집에 들어가니 덕순이는 자고 있었다. 맴도는 걱정을 쫓기 위해 얼른 침대에 누웠다. 유럽 애들은 취업 비자 없어도 돼서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날 대표는 우리에게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벌금을 내라면 내야지 어쩌겠냐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벌금 고지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 사건은 우야무야 잊혀졌다. 나의 취업 비자도 다행히 취소되지 않았다.
독일로 떠나기 전의 이야기부터 해보겠다. 때는 2013년 초여름, 장소는 코엑스 던킨 도너츠.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첫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다. 첫 직장은 독일 게임회사였는데, 한국 지사에서 3년간 일했었고 이제 새 직장을 찾고 있었다. 가고 싶은 게임회사가 있었지만, 면접 결과가 좋지 않았다. 도넛을 먹으며 가만히 나의 취업 근황을 듣던 친구가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주었다.
소개해 준 사람은 독일인이었다. 모바일 광고회사의 창업자로, 최근엔 한국 지사 설립에 분주하다고 했다. 소개는 이메일로 이루어 졌다. 독일인 창업자와 나는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그가 일하는 강남 사무실로 정했고, 이력서를 미리 보내두었다.
소규모 인원이 고급스러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창업자 외에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미팅 룸으로 들어가 면접을 봤다. 면접 내용 중에 수학 퀴즈가 하나 있었는데, 순발력을 발휘해 어찌어찌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하고, 2차 면접을 거쳐 입사하게 되었다. 나는 고객사 관리와 영업을 맡기로 했다. 이직에만 거의 3개월 이상을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안도감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 입사 소식을 알리니 어머니는 또 독일 회사에 붙었냐며 축하해 주었다.
모바일 광고 회사가 돈을 버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들의 스마트 폰 화면에 광고를 뿌리는 게 전부다(너무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해지니 이 정도만 알면 된다). 이직한 회사는 모바일 광고 중에서도 게임 광고에 집중하는 곳이었다. 컴퓨터나 콘솔 게임만 하던 나에게 모바일 게임의 세계는 새로웠다. 빠르게 성장하는 야생의 생태계였다. 야생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기술을 익혀가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한국 지사였고, 본사는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의 동료들과 일하는 재미도 컸다. 첫 직장에서도 독일 본사와 일을 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첫 직장의 본사는 대부분이 독일 사람들이라 그런지, 독일 특유의 경직되고 느릿느릿한 문화가 늘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 번째 직장은 정반대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활기로 가득한 분위기였다. 미팅 분위기는 혼란스럽지만 활력이 넘쳤고, 업무는 치밀함보다 스피드가 중시되었다. 실수를 할지언정 업무 진행이 시원시원했다. 이직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2014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장 갈 기회가 있었다.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라는 행사에 우리 회사가 참석하니 와달라 는 것이었다. 아시아인 한 명을 끼워 넣어 다국적 느낌을 내려는 속셈이 뻔했지만, 어쨌든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니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 처음으로 가는 미국이었다. 언덕과 빅토리아 양식의 집이 많은 샌프란시스코. 날씨는 포근하지만 대중교통은 아주 불편한 곳. 나는 우버를 타고 컨퍼런스 장으로 향했다.
행사장에 들어가니 우리 회사의 부스가 보였다. 부스에 있는 동료 들과 반가움의 포옹을 한 뒤, 본격적으로 행사를 즐겼다. 여느 컨퍼런스와 같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미 함께 일하고 있는 고객사들과 이야기하고, 강연도 듣고, 다른 부스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한국의 컨퍼런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이 회사는 뭐하는 곳입니까?"
처음 보는 사람이 우리 회사 부스로 와서 나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서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같이 일할 수 있는 접점이 있는지 찾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명함 교환을 했고, 있을 것 같으면 나중에 이메일로 연락했다. 대화의 흐름이 아주 쿨했다. 쓸데없는 겉핥기식 대화가 없고, 상대방 나이에 맞춰 말투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본론에 집중하는 문화에 마음이 꽂혔다.
컨퍼런스가 끝나고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같이 출근했지만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샌프란시스코에 매료된 상태였다.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 마음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해외로 가야만 하는 지 스스로를 설득했다. 여러 번 설득하다보니(사실 합리화에 가깝다.) 꽤 그럴듯한 문장이 나왔다. '글로벌 인재가 되려면 실제로 해외에서 일을 해봐야 한다.'
그러나 무턱대고 해외로 가긴 싫었다. 나는 깡 하나만 믿고 돌진 하는 타입은 못 된다. 내가 아무리 원할지언정, 나를 위한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안 되면 되게 하라!'보다는 '왜 안 되는지, 가능한 방법은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자'에 가깝다. 나는 해외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독일은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으니 나의 연봉도 높아지겠지? 돈 때문에 해외로 나가려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돈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 직후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내가 해외에서 취업할 수 있을까? 생각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뭔가 새로운 것을 기분 좋게 상상하다가, 현실의 벽을 걱정한다. 대학 가면 맨날 게임해도 괜찮겠지? 로 시작했다가, 그런데 내가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로 끝나는 패턴. 이럴 땐 깊이 생각하지 말고 바로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생각만 하다 보면 배만 고프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해외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추려봤다. 영업은 하기 싫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반대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가지를 파고드는 게 더 즐겁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개발자였는데, 나는 개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임을 하면서 컴퓨터 관련 잡지식은 나름대로 쌓였지만 잡지식은 팔아먹기 힘들다. 앱 개발이라도 배워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나는 당장 해외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개발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따져봤다.
현재 나의 일은 고객 관리 일이니 고객 관리 일을 찾으면 된다. 게임을 좋아하니 게임 관련 회사에 지원하면 유리할 것이다. 마침 첫 직장이 독일 게임 회사였으니, 미국보다는 독일이 나을 것이다. 어릴 때 프랑크푸르트에 살았던 적이 있어 독일이 더 친숙하기도 하다(어릴 때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어차피 미국은 취업 비자 발급이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최종 적으로는 독일을 목표로 잡았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중 지름길을 하나 발견했다. 지금 나의 직장은 독일 회사의 한국 지사다. 본사는 독일 베를린에 있다. 그럼 0에서부터 독일 취업을 알아볼 게 아니라, 본사로 갈 수 있는 방법 을 찾으면 되겠네? 일반적인 해외 취업 루트는 아니었으므로 누군가는 진정한 해외 취업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진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단 얘기부터 꺼내기로 했다. 당시 한국 지사의 대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터놓고 이야기했다. 꼭 해외에 가야겠다고, 방법이 없겠냐고 졸랐다. 나는 긴장을 잘 숨기지 못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늘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베를린 본사와 이야기해보겠다며 면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본사와 할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많을까. 혼자 속을 태웠다. 지사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신경 쓰였다. 그가 화장실을 갈 때도 눈길이 갔다. 언제 말해줄 거냐며 눈으로 재촉했다. 겉으로는 여유 있게 행동했지만 아마 표정에 드러났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구글 문서 링크였다. 문서를 열어보니 처음 보는 회사의 로고가 여러 개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문서에는 어떤 로고가 마음에 드는지 투표하는 칸이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로고를 훑어보다가, 파란색 네모가 그려진 로고를 골랐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드디어 지사 대표와의 면담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본사와의 대화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다. 그는 자리가 하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호들갑을 떨면서 질문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얼마 전에 받은 로고 고르는 메일 기억나지? 베를린 본사에서 사내 스타트업을 하나 만들 거야. 거기에 가도 괜찮다면 내가 잘 이야기해볼게."
사내 스타트업? 회사 안에 회사를 세운다는 건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갈 수 있다면 그냥 어떻게든 가자. 그리고 며칠 후, 내가 원한다면 베를린으로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퇴근 후 집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부모님에게 들뜬 기분을 쏟아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성취감이었다. 수 년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 지사 대표가 나를 매우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나의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베를린 행이 잠정 확정되었다. 독일에서 일하려면 독일의 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 한국 지사는 퇴직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독일 본사와의 근로계약서를 새로 쓰기로 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연봉 금액이 포함되어야 한다. 연봉협상도 새로 하기로 했다.
나는 연봉협상을 끔찍하게 못한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이 정도 금액을 원한다고 말하는 게 왠지 힘들다. 머리로는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데, 입술은 떨고 있다. 눈 깜빡거리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운 좋게도 연봉 이야기는 전부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한시름 놓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베를린의 급여 수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검색을 해 봐도 뜬구름 잡는 정보뿐이었다. 폭스바겐 엔지니어의 연봉 정보는 있어도, 모바일 광고 회사의 고객 관리 담당자의 연봉 정보는 없었다.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협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베를린 본사에 마테오라는 동료가 있었다. 비록 원격이지만, 1년 가까이 함께 일하면서 손발이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둘 다 게임을 좋아해서 스카이프로 잡담도 자주 나눴다. 그에게 연봉에 대한 고민 상담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약간은 장황한 메일을 보냈다. 현재 본사와 협상 중인데, 어느 정도가 현실적인 범위냐고 물었다. 회사 동료가 아닌 친구로서 묻는 것이지만 불편하다면 말해주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문장도 추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대략적인 금액 범위를 알려줬고,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마테오가 알려준 금액 범위는 내 예상보다 적었다. 독일이니까 연봉이 크게 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 연봉 수준이 낮은 편이다.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은 장점이지만, 세율은 여전히 높다. 그리고 개발 스킬도 없고 컴퓨터 공학 전공이 아닌 내가 처음부터 높은 연봉을 노리는 것은 무리였다. 아쉬웠지만 일단 베를린에 자리를 잡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인사부와 연봉 협상을 시작했다. 마테오가 일러준 금액보다 조금 더 높게 불렀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의 강점을 어필했다. 본사는 내가 제시한 것보다 약간 금액을 낮추고 싶어 했다. 몇 번의 메일이 오간 후, 너무 세게 주장하다가 없던 일이 되면 어쩌나 걱정될 때쯤 적당히 합의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끝까지 의견을 밀어붙이지는 못 하는 편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내어주면서 윈윈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윈윈이 아닌 회사의 승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 했다.
며칠 후 근로계약서의 최종본을 받았다. 서명은 독일에 가서 하기로 합의했다(아직 전자서명이 활성화된 때가 아니었다.). 취업 비자 발급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내가 독일 도착 후 직접 수령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나 입국은 어떻게 해? 비자도 없고 귀국 티켓도 없으니 입국심사에서 날 의심스럽게 볼 텐데."
"비자는 아직 안 나왔지만 노동부에서 너의 근로를 허락한다는 편지는 도착했어. 그 편지의 스캔본을 보내줄게. 비자 대신 그걸 보여 주면 될 거야."
인사 담당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스캔본만으로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걱정해서 무얼 하나. 담당자가 된다고 하니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인쇄한 계약서를 입국심사 때 보여주면 될 것이다. 그것도 안 되면 인사 담당과 통화를 시켜주면 될 것이다. 약 한 달 반 뒤에 독일로 떠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독일 근로계약서와 노동부 편지 스캔본. 첨부 파일을 계속 열었다 닫았다. 기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문서화되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감격을 간직한 채로 퇴근했다. 늘 그렇듯이 만원 지하철이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샤워로 강남의 때를 씻어낸 후 부모님과 저녁을 먹 었다. 게임을 하며 머리를 비우다 금세 피곤해져서 불을 끄고 누웠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여자 친구인 덕순이었다. 독일에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간다면 꼭 덕순이와 함께 가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을 그려봤다. 한 달 반 후에는 베를린 본사에 출근해야한다. 덕순이와 함께하려면 덕순이도 독일 비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부부라면 그녀는 배우자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아니, 그전에 덕순이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프러포즈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을까, 결혼은 좋은데 독일은 가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다.
우리는 분당 서현역 근처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던 곳이다. 덕순이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각자 파스타를 주문해서 서로 맛보라며 포크로 돌돌 말아 상대방 그릇에 올려줬다. 그러던 중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어색함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결혼해줬으면 좋겠어."
결혼하자면 하자고, 하지 말자면 말자지, 해줬으면 좋겠어는 뭘까. 말하고 나니 쑥스러워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고는 프러포즈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같이 독일 가서 살자."
그녀가 나와 결혼해 함께 독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이 80% 정도는 있었다. 왜 독일로 가고 싶은지, 어디서 일할 것인지, 비자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설명했다. 현실적 상황을 그녀가 정확히 알고 대답해 주길 원했다. 그리고 다행히, 덕순이는 날 받아주었다. 나와 결혼도 하고, 독일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평소의 대화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가 흠뻑 빠졌던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이야기를 했다. 연인인 동시에 친구 같은 느낌이 좋아 덕순이와 결혼하고 싶었다. 화려한 이벤트도 감동의 눈물도 없어서 정말 이걸로 된 건가 싶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답을 해주었다.
내 안의 80% 확신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언젠가 각자의 결혼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깊은 의미 없이 그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다고 말했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식은 생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되어도 각자의 공간이 뚜렷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도 이 때 덕순이와의 결혼을 확신했던 것 같다.
나 또한 결혼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다. 결혼식은 생략하기로 자연스레 의견이 맞춰졌다. 서운해 할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는 마침 급히 독일로 가게 되었다는 좋은 핑계도 있었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들께서는 큰 반대 없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다. 대신 아예 생략하는 것은 아쉬우니, 가족들끼리만 모여서 치르는 것으로 정했다. 친구들과는 따로 만나 밥을 사주며 배우자를 소개했고, 친척들에게는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결혼식은 양가 가족들이 모여 결혼 예배와 식사를 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식사만 하면 허전할 것 같아 결혼 예배를 제안했는데(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다), 덕순이 집에서도 찬성해 주었다. 사회는 교회 목사님이신 나의 외삼촌이 맡아 주었다. 장소는 평소에 가 볼 일 없는 근사한 중식당의 별실이었다. 넓은 테이블에 다 같이 둘러 앉아 있는 것이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로가 대화할 만한 주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 이야기와, 덕순이와 나의 연애사가 주로 거론되었던 것 같다. 다 함께 기도를 하고, 덕순이의 손을 잡고,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니 눈물이 났다. 원래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신부 아니었나? 그 자리의 모두가 우리를 축하해주는 모습에 감동했다.
"울었대~요!"
덕순이는 나를 놀렸다. 요즘도 가끔 놀리곤 한다.
식사 후 덕순이와 나는 가평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펜션에 짐을 풀고 아침고요수목원을 갈 예정이었지만, 둘 다 너무 피곤했다. 결혼식과 운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계획했던 모든 일정을 깔끔히 지우고 실컷 낮잠을 잤다. 저녁이 되니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발코니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이제 부부였다.
"독일에 가서도 같이 밥 먹고, 치우고 하겠지?"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뒷정리를 같이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를 봤다. 덕순이와 밥 먹고 설거지 하고 영화를 보다니. 같이 사는 부부였다. 머릿속에 독일에서의 신혼 생활이 자연스레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마친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베를린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작전을 짜야했다. 거주할 집을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겪어야 할 것이다. 둘이서 고생하는 것보다 혼자 고생하는 게 낫다. 그러니 일단 내가 먼저 독일로 떠나 자리를 잡고, 6개월 후에 덕순이가 합류하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나 혼자서 6개월간 살 집을 물색했다. 베를린 월세난이 얼마나 끔찍한지 본사 동료들에게 가끔 들어보기는 했다. 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실제로 검색을 해보고 현실을 깨달았다. 외국인 주제에 3개월 치 급여명세서조차 없는 녀석은 후보자 명단 최하단에 위치한다. 베를린은 외국인 유입이 활발한 도시였고, 방을 구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집주인들이 굳이 나를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6개월 동안 호텔이나 에어비앤비에서 지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돈이 문제였다. 글을 쓰는 지금도 베를린의 월세난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정으로 어떻게든 비벼볼 수작으로 베를린 한국인 커뮤니티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다 벼룩시장 게시판에서 'WG 들어 올 사람 구합니다.'라는 글을 찾았다. WG(Wohngemeinschaft)는 한 집에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방식을 말한다.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룸이나 부모님 집에서 사는 게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베를린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집에서 방만 따로 쓰는 경우가 흔하다. 글을 올린 사람은 한국인 부부였다.
나는 그 부부에게 메일을 썼다. 꼭 나를 세입자로 뽑게 하고 싶어서 메일에 힘을 줬다. 그냥 '방 구합니다~'로 끝내지 않고, 나에 대한 정보를 빼곡히 담았다. 독일로 가는 이유, 이름, 성별, 나이, 회사 주소와 홈페이지, 희망 거주 기간, 개인 페이스북 주소까지 전부 적었다. 물건을 깨끗이 쓰는 성격이고, 하루의 대부분은 일하러 나간다는 내용도 넣었다.
그리고 나는 기적처럼 간택 받았다. 부부가 메일로 방사진을 보내 주었는데, 대학시절 자취방보다 훨씬 큰 방이었다. 창문도 널찍해 시원해 보였다. 낡은 집이었지만 그만큼 운치 있었다. 월세는 월 500유로에, 보증금 500유로로 나쁘지 않았다. 위치도 사무실과 가까웠다. 직접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방을 빌려주다니. 나를 신뢰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분명 좋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메일에서도 신뢰가 느껴졌다. 신뢰라는 것이 참 주관적인 것이긴 한데, 어쨌든 있었다. 운이 좋다고 느꼈다. 본사 동료들에게 집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니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았다.
내가 독일에 도착하는 날짜와 입주 날짜 사이에 2주 차이가 있어서 그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에어비앤비에서 지내기로 했다. 한국 휴대폰과 적금을 해지하고, 환전을 하고, 물건을 정리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공항에서 덕순이와 포옹을 하고, 눈물을 삼키며 보안검색대로 들어갔다. 덕순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뒤돌아봤지만, 입구에 세워진 벽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베를린에서 일하기 전에도 독일에 가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첫 직장의 본사 함부르크로 출장을 두세 번, 이직 후엔 신입사원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베를린 본사에 한 번 다녀왔고, 초등학교 시절 약 4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독일에 대해서 아주 잘 알지는 않아도 친숙함 정도는 갖고 있는 상태였다. 독일어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형편없지만.
인천에서 모스크바를 경유해 베를린 쇼네펠트(Schönefeld) 공항에 도착했다.
"왜 편도 티켓 밖에 없습니까?"
예상대로 입국심사원이 물었다. 나는 가방에서 노동부 편지의 스캔본을 꺼내 보여주었다.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지만, 다행히 그는 입국도장을 꽝꽝 찍어주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이어서인지 몸이 지쳐있었다. 밤이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냥 택시를 탈까 하는 유혹이 생겼지만 이제부터 현지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S반(지상철)을 타기로 했다. S9호선을 타고 에어비앤비가 위치한 그라이프스발더슈트라세(Greifswalderstraße)로 향했다. 전철에 사람은 거의 없었고,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야경이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창문에 빗방울만 잔뜩 맺혀 있었다. 낭만 가득한 유럽에 도착했다는 설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시커멓고 비 내리는 밤이었다.
역에서 내려 종이 지도를 확인했다(로밍은 따로 하지 않았다.). 지도가 비에 젖으면 안 되니 정류장 지붕 아래에서 미리 확인하고 걸었다. 빗물이 새어 들어와 양말을 적셨다. 왜 운동화를 새로 사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무거운 캐리어백을 끌면서 20분 정도 걸으니 주택 단지가 나왔다. 주소와 일치하는 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집이 맞나 긴가민가하면서 건물 입구의 초인종을 훑어 봤더니 에어비앤비 주인의 이름이 보였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에어비앤비 예약한 사람입니다."
덜컹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비와 땀에 젖은 찝찝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니, 에어비앤비 주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집 안내를 받고, 샤워를 하고, 짐을 풀었다. 배가 고팠지만 다시 빗속을 걷기는 싫어서 가방에 챙겨 온 기내식 과자로 허기를 달랬다. 와이파이를 연결해 가족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다 그대로 뻗어 잤다.
출근까지는 2주가 남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주로 동네 구경을 하며 여유롭게 보냈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슈퍼에서는 무엇을 파는지, 재활용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는지, DVD 대여점의 인기 영화는 무엇인지 등을 관찰했다. 사무실 위치도 미리 확인했고, 앞으로 함께 살 한국인 부부도 만났다. 만나서 계약서도 쓰고, 보증금도 주고, 같이 차도 마셨다.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베를린에 얼마나 오래 살지는 미리 정하지 않았다. 1년 살다 돌아갈 수도 있고, 평생 살 수도 있고, 다른 도시로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덕순이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다. 어차피 앞일은 알 수 없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이제 난 독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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